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만큼 표현의 욕구로 흘러넘치는 것도 없다.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 편지를 쓰게 한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어렵고 진정하며 운명적인가를 설명하고 싶었다. 편지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매혹시키는 방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랑의 편지는 마지막 순간, 도구적이지 못하다. 세상의 모든 글쓰기가 최후의 순간에는 처음에 품었던 소소한 의도를 배반하는 것처럼, 그 통제할 수 없는 익명의 욕구가 그 편지의 현실적인 목표를 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모든 사랑의 편지에는 아무 전언도 들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결정적인 정보나 주장이 들어 있지 않다. 다만 내 고백을 누군가가 들어준다는 충만한 느낌, 희미한 불빛 아래서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할 때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부끄러움 따위. 고백이란 결국 2인칭을 경유하여 1인칭으로 돌아온다. 그의 들끓는 고백의 언어들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다. 한동안 그는, 사랑하는 OO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자주 썼다. 그녀는 그의 편지를 사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편지 속의 그'를 그녀는 사랑했다. 편지 속에는 그가 찾아낸 자신의 또 다른 영혼이 있었다. 또 다른 영혼의 '그'는 순수한 열정과 끝 모를 동경과 깊은 이해심을 가진 존재였다. 그도 역시 그녀처럼 자신의 편지 속 1인칭 화자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하지만 너무 뻔해서 가혹했던 지리멸렬한 시간들 속에서 그는 편지 속의 1인칭 주체를 잊어 버렸다.
편지조차 쓸 수 없는 시간들이 무심하게 지나가고, 다시 편지를 쓰고 싶었을 때, 그는 이미 '편지 속의 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편지 속의 그'를 연기하는 것이 부끄러웠고, 자신의 비루함을 뼛속 깊이 실감했다. 그는 '사랑하는 OO에게'라는 편지를 쓰고 싶어 하는 자신 속 어떤 늙지 않은 영혼을, 그 순수한 인격을 외면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듣기를 바라는 모든 고백이란, 위선이 아니면 위악이다.
이광호,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사랑의 미래] 일부
사랑하는 자는 하나의 장소를 만나고, 다른 계절로 떠나야 한다. 그 사람의 계절은 보다 더 짧거나 더 강렬하거나 더 느릴 수도 있다. 우리가 같은 문장에 머무를 수 없는 것처럼, 생을 통해 하나의 계절을 지킬 수는 없다. 계절이란 기억과 시간에 대한 단념의 이름이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이건 그들이 통과한 계절들의 이미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계절들의 돌이킬 수 없는 순환에 관한 것이다.
[……]
계절들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리듬일 뿐이다. 그 몇 개의 계절들은 돌이킬 수도 돌이킬 필요도 없었다. 지난 계절의 지독했던 기침을 어느 날 문득 삼켜버린 것처럼, 그렇게 망각의 힘을 믿게 될 것이다. 계절에는 미래가 없다. 한번 가지에서 날아간 새들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저녁의 새들이 갑자기 침묵하는 순간처럼,
그 계절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사랑이, 그렇게 지나갔다. 서로 엇갈리는 긴 시간보다 분명한 것은 그 기억조차 흐려지는 날이 온다는 것. 언어만이 그 계절들을 봉인한다. 어떤 사랑의 이야기는 망각의 힘으로, 망각하려는 힘으로, 다시 쓰인다. 기억보다 더 오래된 세월을 향해.
_「프롤로그-한때 새들을 날려 보냈던 계절들」에서
그들이 사랑한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마주 앉아 연인의 턱 밑의 희미한 점이나 회색 니트 위의 작을 보풀마저 매혹과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시절은 얼마나 될까? 연인의 떨리는 허리를 파고들며 지금 세상이 정지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나지막한 주문을 외우던 순간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가장 흐릿한 별빛이 지구에 간신히 도착하는 시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이유로, 사랑의 순간이 너무나 짧다는 이유로, 지금 눈앞에 있는 연인의 왼쪽 손목을 어루만지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까?
[……]
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다. 어떤 희망도, 어떤 목적도, 어떤 대가도, 어떤 이름도 없이.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하늘의 늙은 그림자 아래서 ‘당신’이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면, ‘나’도 한 숟가락의 밥을 뜨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 걸음이 당신의 미래에 이르게 된다 해도
당신 놀라지 말아요.
_「에필로그-이제는 그대 흔적을 찾지 않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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